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스카 로메로 (문단 편집) == 평가: 해방신학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 로메로 주교가 처음부터 진보 성향은 아니었다. 그는 본래 전통주의자였고, 독재정권의 무자비한 인권 탄압에 그리스도인으로 인권을 옹호했을 뿐, [[해방신학]]과는 거리가 있던 보수적인 주교였다. 일례로, 로메로 주교는 해방신학의 오류를 교리적으로 반박하는 임무를 맡은 [[오푸스 데이]]의 성 십자가 사제회와 교류하며 영적 도움을 받았다. 그가 [[순교]]한 날 아침에도 [[오푸스 데이]] 협력 사제 모임에 참가한 후 [[미사]] 집전 중에 피격을 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순교 후에 그를 해방신학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오스카 로메로가 당시 마르크스주의를 일부 수용한 해방신학의 이론가거나 운동가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루틸리오 그란데 신부의 순교 이후 그의 강론은 당시 라틴아메리카 예수회를 중심으로 퍼져있던 해방신학의 이야기와 일정 부분 공통점을 지녔던 것이 사실이다. 그 동안의 소극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민중과 함께하는 적극적 모습으로의 극적 변화 역시 그를 민중의 지도자로 여기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단순히 해방신학의 내용을 떠나 그의 삶이 자연스럽게 그를 엘살바도르와 라틴아메리카의 저항의 성인으로 만든 것. 해방신학과 그를 따른 성직자들이 성인에게 끼친 영향은 과장되지도 과소평가되지도 않아야 한다. 어쨌든 진작에 시성이 되어야 했지만, 해방신학 추종자들이 이를 자신들의 교리를 정당화하는 데 악용할까 우려한 교황청에서 이를 늦춘 것이다. 특히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신앙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지니고 있던 [[요한 바오로 2세]]는 오스카 로메로의 시성을 강력하게 거부했다. 인권 탄압에 저항하는 것은 가톨릭에서는 보수건 진보건 당연한 일이다. 이를 두고 소련을 위시한 공산진영에 맞서는 것은 장려하면서, 반공을 명분으로 자국민을 탄압한 남유럽(예: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과 중남미 국가의 군부 독재정권에 대해서는 소극적이었던 20세기 천주교회의 이중적인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는 비판, 지적을 받기도 한다. 물론 프랑코 정권 문제는, 스페인 극좌파들에 의해 저질러진 옥석을 가리지 않는 무차별 교회 탄압과 학살 문제도 함께 고려해야 할 일이다. 다만 해방신학의 문제를 떠나 오스카 로메로의 죽음을 '순교'로 볼 수 있느냐의 문제도 있다. '순교'란 탄압 앞에 하느님을 위해 기쁜 마음으로 죽는 것인데 여기에 정치적 고려가 들어가 있으면 복잡해진다. 우리가 아는 순교는 대부분 법적, 정치적으로 믿음을 막는 세력에 의한 죽음이지만,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헌법에 명시적으로 인정하는 나라가 점차 늘어나는 가운데(심지어 북한 조차도) 독재정권이나 군사정권과의 투쟁을 어떻게 평가하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에 복잡해진 것. 오스카 로메로의 시성으로 이제 이런 작업의 첫발을 뗀 것.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